피움 ㅣ 코너별 보기

발전대안 피다에서 격월로 발행하는 웹진 '피움' 기사를 코너별로 보실 수 있습니다. 

피움 ㅣ 코너별 보기

현장[13호] 아래로 가는 여행 ⑤ 대안이 아니라 기본

2018-03-30
조회수 5537


아래로 가는 여행 

⑤ 대안이 아니라 기본


[편집자 주] 발전대안 피다의 전신인 ODA Watch의 실행위원이었던 탐디(이선재)는 5년째 라오스에서 청년들과 어울려 살고 있습니다. 지난 2013~4년 OWL을 통해 '라오 이야기'를 연재해 라오스의 사람과 개발에 대해 큰 울림을 주었는데요.피움 9호부터 라오 이야기 이후 사는 '힘'을 찾으러 떠난 긴 여행길의 이야기를 이어왔습니다. 이번 13호는 <아래로 가는 여행> 그 마지막 글입니다.


① 라오를 짝사랑한 남자 (클릭)

② 구름에 달 가듯 (클릭)

③ 일상을 밀고 가는 힘 (클릭)

④ 마을을 다시 생각하다 (클릭)

⑤ 대안이 아니라 기본


지난 글 ‘마을을 다시 생각한다’를 읽은 사람들이 “네가 사는 마을은 낙원인 것 같은데,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이렇게 물어볼까 걱정했다. 뭐라 대답하지? 우리 마을에 와서 살라고 할 수도 없고, 가진 걸 모두 버리라고 하면 돌 맞을 테고,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 바보소리 들을 거다. 한국과 나케의 간극이 너무 크다. 라오는 옛 한국처럼 살고 있는데 한국은 라오처럼 살기에 너무 멀리 가 버렸다.



마을과 공동체


재작년 한국의 한 대안학교에서 내게 물었다. “그곳에 대안적인 삶을 살고 있는 공동체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에 대안적인 삶을 사는 공동체는 없답니다. 대안이 아니라 기본의 삶을 살고 있지요. 개발의 뒤를 잇는 대안이 아니라 개발 이전의 삶이 있는 곳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별 생각 없이 마을에 살았는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공동체가 뭐지, 마을과 공동체 차이는? 내 나름대로 비교해본다. 공동체는 정해진, 보이는 규칙이 있고 마을은 보이지 않는 규범이 있다. 공동체는 의도해서, 마을은 자연스레 만든다. 공동체는 대를 잇지 않지만 마을은 자자손손 이어간다. 공동체는 깔끔하고 마을은 어수선하다. 공동체는 갈등을 피하고 마을은 갈등을 마주한다. 공동체는 대안으로 마을은 기본으로 산다. 나는 공동체에 관심이 없다. 싫은 게 아니라 성질이 다르다. 나는 자유롭고 엉망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마을공동체는 없다. 마을은 마을이고 공동체는 공동체다. 마을 안에 공동체가 있을 수는 있겠다. 예를 들면 가족공동체, 종교공동체, 생활공동체, 경제공동체 등등. 인천시 검암동에 우동사(우리동네사람들)라는 주거공동체가 있다. 청년들이 마을에 점점이 박혀 주민들과 이웃하며 산다. 끼리끼리 어디 따로 사는 게 아니라 보통 마을에서 지지고 볶으며 있다. 우동사는 규칙이 없다. 뭔가 미리 정하지 않고 자주 모여 이야기를 나눈단다.


대안학교의 관심은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학생을 길러내는 일이다.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장려한다. 부모들이 그렇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유명 공동체에 가서 어떤 자유와 평등을 배울까? 자기를 발견하고 세상의 가치를 깨달을까? 대안학교가 아니라 기본학교가 필요한 게 아닐까?



프라이버시가 없겠어요.


▲ 어느 가을 우리집 ⓒ 이선재


우리 집은 2층으로 나는 아래에 살고 직원들은 위에 살았다. 층 사이는 대나무로 된 돗자리와 천장 뿐이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 침 삼키는 소리까지 들려 모두 조심조심 산다. 여기 온 한국인이 묻는다. “소리가 다 들리는데 프라이버시가 없는 거 아니에요?” 내가 되물었다. “프라이버시가 뭐예요?” “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프라이버시, 무척 중요한 거다. 한국에서는 프라이버시를 공간으로 이해한다. 사무실에 칸막이 하고 독방 쓰는 게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일이다. 사실은 유무선 통신 감시하는 게 더 문제다. 생각과 표현을 막는 게 진짜 프라이버시가 없는 거다. 푸딘댕에 ‘라온아띠’라는 이름의 대학생들이 온다. 다섯 달 동안 마을에 살며 청소년들에게 영어도 가르치고 여러 활동을 한다. 한 명씩 홈스테이를 하는데 한국과는 다른 문화와 생활양식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라오는 아이들이 많은데 방이 적어 혼자 쓰지 않는다. 자연스레 한국 학생들도 민박집 아이와 한 이부자리를 덥고 ‘같이’ 자는데, 불편하다고 못 견디는 학생들이 있다.


한국 아이들이 ‘독방’을 갖기 시작했다. 아이가 적어 공간의 여유가 있기도 하지만 자유,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배려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율적이고 독립 정신이 길러졌나? 배타적이 된 건 아닌가? 화난다고, 부모에게 혼났다고 방문 꽝 닫고 들어가 문 잠그고 쳐 박히지 않나? 방문에 부모를 향한 경고문을 붙이지 않나? 아이가 음식점에서 떠들며 돌아다니는 걸 다른 사람이 나무라면 왜 우리 아이 기죽이냐고 목소리 높이는 부모를 본 적이 있나? 이렇게 키운 아이들이 지금 20대가 됐다.


한국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나? 동양도 서양도 아니다. 서양 사람들이 자유·평등·박애를 주장하면서도 균형 있는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우리는 헛것만 보고 달려왔다. 개인의 자유를 신장한다고 공동체의 가치를 팽개쳤다. 프라이버시처럼 껍데기만 배웠다. 싸구려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2017년 봄, 한국


작년 봄 한국에 오래 머물며 여러 곳을 다녔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마을에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가야할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아래로 가는 여행'을 소개하고, 매일이 힘든 청년들과 '일상을 밀고 가는 힘'을 얘기했다. 마을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마을과 공동체는 다르다'고 주장하고, 대안을 찾는 곳에 가서는 '대안이 아니라 기본이다'라고 제안했다. 내 생각을 마구 질러대는 바람에 사람들이 놀랐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순하고 착해졌다고 한다.^^


한국을 찬찬히 살펴봤다. '편리 지상주의' 나라답게 모든 게 갖춰져 있다. 라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개발된 나라다. 서울엔 없는 게 없다. 라오에 산지 5년이 넘으니 낯선 게 많다. 무엇을 하려면 자꾸 주춤거린다. 무수한 자판기 앞에 서면 긴장된다. 그렇게 시스템은 있지만 사람이 없다. 서로 만남과 충돌을 기피한다. 부딪치면 날카롭게 반응한다. 긴장과 화가 턱밑까지 차 있다. 누가 건들기만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서로를 경계한다. 등에 작은 배낭을 멘 나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면 부딪칠까 몸이 작게 움츠러든다.


뒤틀린 개발이다. 바꿔야 산다. 대안이 아니라 기본을 생각한다. 기본이 뭐죠? 사람마다 마을마다 일마다 다를 거다. 나도 잘 모른다. 먹고 사는 게 기본이지. ‘만나면 인사하는 건 기본이야.’ ‘에이 기본이 안됐어.’ 이런저런 표현이 있다. 사전에는 ‘사물·현상·이론·시설 따위의 기초와 근본’이라 한다. 나케와 한국을 오가며 한국에서 잃어버린 기본 두 가지를 발견했다. 자연과 불편이다.



자연은 더러운 것?


유독 한국인은 비를 싫어한다. 여러 나라를 다녔지만 그렇게 비를 더럽다고 피하는 사람들은 없다. 흙도 더럽다. 자갈도 더럽다. 강물도 더럽다. 작년 서울 거리에서 만난 일, 대여섯 살 된 아이가 길을 가며 무엇이든 만지려 한다. 전봇대도 간판도 가로수도. 엄마는 계속 신경이 쓰인다. 더럽다고 소리치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머리통을 쥐어박힌 아이가 세상을 향하던 손을 거둔다.


비가 내리면 우리 집 앞은 신나는 놀이터다. 꼬맹이들이 뛰기 시작한다. 옷을 벗어던지기도 하고 입은 채이기도 하다. 비가 마구 쏟아지면 풀도 흙도 미끄러워 어디든 미끄럼을 탈 수 있다. ‘왜 비를 피하지 않지?’ ‘부모들은 왜 뭐라 하지 않을까?’ 감기들 걱정도, 옷 젖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뛰는 아이들, 공차며 깔깔거리는 청소년들, 쏟아지는 빗속을 천천히 걷는 사람들. 비는 뭔가?


▲ 빗속의 아이들 ⓒ 이선재


한국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졌다. 아니 개발하는 과정에서 분리하고 격리했다. 자연에 대한 시각과 태도가 비‘자연’적이다. 새, 동물, 나무, 풀, 돌멩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 예전에는 자연에 있는 걸 집으로 가져와 내 것으로 간직하려 했다. 요즘 덜한 대신 사진을 찍는다. 새를 대하는 자세를 보라. 한국인은 찍고, 서양인은 보고, 라오인은 잡는다.


우리 집은 모기, 개미, 바퀴벌레, 거미, 이름도 모르는 벌레들이 드글드글하다. 한국인들은 벌레 무서워 나케에 못 잔다. 닭 잡는 일, 피만 봐도 소리를 지르며 놀란다. 그것보다 끔찍한 일을 국가, 공권력의 이름으로 서슴없이 하면서. 무엇이 더 문제일까? 한국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돌아갈 필요가 없나?


한국에서 아파트가 대박이 난 건 재산 증식 때문만은 아니다. 아파트는 자연과 불편으로부터 나를 지킨다. 그 안에서 우아한 삶을 산다. 내 손에 더러운 거 묻히지 않는다. 자연을 내다보고, 필요하면 놀러 가면 된다. 그렇게 멀어진 게 자연만이 아니다. 사람과 이웃이 멀어졌다.



불편은 죄악


한국에서 직장 다니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점심 먹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는데 한 직원이 들어왔다. 드르르 소리 나는 전동칫솔로 이를 닦는다. ‘이게 뭐지? 아니, 멀쩡한 두 손 놔두고?’ 더 잘 닦이나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눌렀다. 지난 달 나케 청년들과 태국에 갔을 때다. 으리으리한 백화점 전자제품 매장에 구경 갔다. 뭔가 바닥에 돌아다닌다. 로봇청소기다. 나케 청년들이 혀를 끌끌 찬다. 전동칫솔 만큼 충격을 받았나보다.


불편이 싫다. 무작정 싫다. 편리함은 기본 욕구라지만 갈 때까지 가고 있다. 몸을 쓰지 않으려는 얄팍한 생각은 끝이 없다. 24시간/365일 운영하는 가게, 시도 때도 가리지 않는 살인배달, 사람과 자연의 리듬을 깨는 일이다. 최근 라오에도 24h/365d가 생기고 있다. 마치 개발의 척도와 표상처럼 여긴다. 자연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이다.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가사노동의 해방이 중요했다. 가사란 ‘집안 살림에 관한 일’이다. 셀 수 없이 가짓수가 많다. 엄마들이 가사 때문에 꼼짝도 못했다. 세상이 변하고 돈이 생겼다. 냉장고는 혁명이다. 세탁기, 진공청소기, 식기 세척기도 등장했다. 파출부도 있다. 무엇이든 고치는 수리공도 있다. 그렇게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하나? 어디서 해방 됐나? 시간에서? 자신에게서? 그래서 행복해졌나?


라오는 지금도 가사에 매달려 산다. 세 끼 밥해먹고 치우면 하루가 간다는 말이 있다. 맞다. 빨래도 많다. 장작도 팬다. 가축도 키워야지. 아이가 많으니 손이든 등이든 아이가 매달려있다. 나도 그렇게 산다. 세 끼 밥해먹고 치우며 산다. 세제를 쓰지 않고 세 번 주물러야 하는 손빨래는 불편하다. 편리한 걸 애써 찾지 않고 그대로 산다. 나케 사는 한국 자원활동가들은 힘들다. 가사는 하찮은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사 말고 뭔가 보람 있는 일,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대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도 되는지 걱정이다. 우리는 그렇게 삶과 일을 분리하고, 삶의 시간을 일에 쏟아 부었다. 세 끼 밥해먹고 사는 건 ‘의미’ 있는 삶이 아니다.


다시 가사노동을 빡세게 하자는 게 아니다. 내가 편리하기 위해 누가 힘든지, 편리한 걸 갖기 위해 얼마나 낭비하는지, 몸을 쓰지 않는 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생각하자. 살인배달은 주인이 하지 않는다. 24시간 편의점과 주유소는 알바생이 지킨다. 불편할 때 성장한다. 생각한다. 참을 줄 안다. 단련시킨다. 남의 불편을 안다.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게 불가능한가? 정말 소비를 줄이지 못하나? 그게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의 본질인가?



변방에 서서


내가 사는 왕위앙은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난다. 한국 젊은이들도 거리를 메운다. 내 생각에 몇 년 후 중국에서 내려오는 고속철도가 완공되면 중국인 세상이 될 거다. 시내는 중국인들이 모두 차지하고 라오인은 식당, 호텔, 여행사, 마사지 숍에서 허드렛일만 하게 된다.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라오인은 시골구석에 있겠지. 그렇다면 라오 청년들은 고향에 사는 걸 좋아하니 시골에 먹고 살 거리를 만들자. 나케 청년 쨈과 분미를 앞세워 태국에 다녀왔다. 캄보디아, 태국, 라오스 농민들이 모여 농업, 농촌, 농민 이야기를 나눴다. 캄보디아에서는 사탕수수 공장에 농토를 빼앗긴 사람들이 왔다. 자본이 주도하는 대규모 농사에 맞서 소농을 지키는 유기농을 공부했다.


▲ 농사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라오 청년들 ⓒ 이선재


며칠 후면 제주 4·3 70주년이다. 80년대 후반, 금기였던 제주 4·3 자료들을 보고 김석범의 「화산도」 다섯 권을 읽으며 전쟁과 폭력의 잔혹함에 몸서리를 쳤었다.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나는 어떻게 그런 책들을 찾아 읽었을까? 왜 변방의 소외된 곳에 마음이 갔을까? 지금은 그 마음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늘 변방을 그리워했다. 변방은 언제나 소외되고 왜곡되고 어렵게 산다. 잘 먹고 잘 살면 변방이 아니겠지. 변방의 소리를 듣는다.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라오의 새해가 다가온다. 곧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농부들도 바빠진다. 한국도 봄이 왔다. 좋은 소식들이 들린다. 계절뿐 아니라 우리 마음도 세상도 꽃이 피길 바란다. 다섯 번의 연재를 마치며 다음 여행을 생각한다. 아래로 가는 여행을 이렇게 어렵고 딱딱한 글이 아니라 흥미 있는 소설로 쓰고 싶다.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다시 짐을 꾸려 길을 나선다.



기사 입력 일자: 2018-03-30


작성: 탐디(이선재) / tobefreelee@gmail.com



4 0